[실록 전북민주화운동사] 87년 항쟁이후 민주화 운동의 전개
2006년 10월 23일 (월) 새전북신문
△교육민주화의 씨앗,교원노조로 결실맺어 80년대 초중반, 군사정부에 대항한 민주화운동이 본격화 되면서 교육계에서도 현장의 문제점을 자각하고 집단적이고 지속적인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한 교사들에 의해서 모임들이 꾸려지기 시작했다.
탄압을 피해 합법적인 공간인 YMCA를 통하여 활동을 시작한 Y교사모임은 서울, 광주 등이 중심이 돼 전국의 도시로 점차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전북에서는 85년 여름 전북기독교농촌개발원에서 이미영, 김혜선 등이 주축이 돼 3박 4일간 자체 세미나를 조직하는 등 젊은 교사들의 소모임이 꾸려지기 시작했고 86년 1월 전국 Y교사대회에 7명이 참여하게 된다.
이같은 물밑작업이 이어지면서 86년 5.10 교육민주화선언에 동참하여 7월 12일 50여명의 교사들이 완주군 이서면 기독교농촌개발원에 모여 전북교육민주화선언을 발표하면서 전주YMCA중등교육자협의회(회장 김진술·부회장 김혜선·총무 이미영)를 창립하였다.
전북교육민주화선언에서 교사들은 현재의 교육현실을 일제군국주의 교육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중앙집권식 관료행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진단하고,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실질적으로 보장할 것, 교육자치제의 실현, 자주적 교원단체의 설립과 활동의 자유 보장과 강요된 보충수업과 심야학습의 즉각 철폐를 주장하였다. 정치적 메시지를 최대한 절제한 교사들의 선언조차 당시 정권은 용납할 수 없었다. 교사들의 교육민주화선언과 Y교협의 결성소식이 전북지역의 교사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창립 소식을 파악한 당국은 Y교협을 용공시하며 대대적인 탄압을 통해 와해작업에 나섰다. 명단이 공개된 8명의 교사들에게 가족까지 동원하여 집중적인 회유와 협박이 가해졌다. 도교위는 6명의 회원을 징계위에 회부하였고, 회원들은 부당성을 지적하며 출석을 거부하였다.
천주교전주교구정의평화위원회, 기독교장로회전북노회 등의 단체에서 도교위는 탄압을 중지하라는 성명서를 내는 등 재야진영의 지원이 시작되었다. 9월 13일 전주카톨릭센터에서 100여명의 교사가 모인 가운데 교육민주화실천 결의대회가 열렸다. 86년 아시안게임 후로 미뤄왔던 민주교사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전주Y교협회원들에 대한 탈퇴강요, 정직, 좌천, 감봉 등의 징계가 내려졌다. 오수고에서는 ‘김혜선 교사’를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대자보와 호소문을 배포한 학생들에게까지 무기정학, 유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김진술 Y교협회장이 있던 김제상고에서는 신입생 모집을 위한 학급증설을 허락해주지 않겠다고 위협하는 치졸함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주변 동료교사들의 격려와 성금은 현장교사들의 뜻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87년 1월 15일, 이미영 교사 해임, 이복순 교사 감봉 3개월의 징계처분이 있자 종교인권단체와 전북민협 등이 공동으로 ‘민주교육탄압 저지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시켰으며 규탄성명, 기도회, 서명작업을 전개했다. 전주Y교협은 교사대중에게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탄압을 받아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힘은 축적할 수 없었으나 교사들의 주체적인 실천을 선언하며 전북교사운동의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컸다. Y교협의 탄압과정을 통해 전북의 교사들은 교육민주화가 사회의 민주화와 함께 해결될 수 있다고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북 교육민주화운동사에서 기록에 남을 일 중 하나가 87년 6월 8일 전두환 정권의 개헌유보조치 철회를 요구하는 시국선언에 현직교사 17명이 참여한 사건이다. 김근수(동신여상), 김영심(회현중), 김혜선(위도고), 문채명(동신여상), 선신영(운봉중), 유정미(남원중), 이복순(무풍중), 이연희(복흥중), 이재권(순창농고), 이향(변산중), 전수환(이리 고현국), 정봉숙(임실 대리국), 정은숙(진안 동국), 정찬홍(고창 상하중), 최명우(남원고), 김윤수(상산고), 송보석(해성중) 교사 등 17명이 학교현장에서 4.13조치의 당위성에 대한 연수, 학부모 계도, 나의 각오 등을 쓰게 하는 작태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고백하면서 정치민주화 없이 교육민주화 없음을 선언한 이 공동성명은 교사로서는 전국 최초의 일이었기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전주Y교협은 87년 6월항쟁 이후 3차례에 걸친 공개강좌 및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교사대중의 여론은 교사대중의 자주적인 조직이 없으면 교육 민주화를 위한 최소한의 성과도 기대할 수 없음으로 어용노련을 탈퇴, 이를 무력화시키고 자주적이고 대중적인 교사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졌다. 87년 8월 민주교육추진전북교사협의회 준비위원회(위원장 김윤수 상산고 교사)가 결성되어 7개 시·군 대표를 선출하였다. 민주교육추진전북교사협의회(이하 전북교협)는 87년 9월 25일 200여명의 교사들이 모인 가운데 창립을 하였다. 대회장인 전주 금암교회는 500여명의 경찰, 교육관료 등에 의해 원천봉쇄 되었고, 연좌농성과 몸싸움으로 대회장을 향하던 교사들은 결성대회를 도로변에서 거행하였고 2부를 남문교회에서 치루는 등 초기부터 어렵게 출발하였다. 이후 전주·완주교사협의회를 시발로 각 시군교협이 속속 결성되었다.
87년 9월에는 정읍 동신여중고에서 단위학교 평교사회를 결성하여 학교민주화운동의 새 지평을 열기도 하였다. 전북교협은 교육관계법 개정운동과 해직교사 복직, 부당전출 거부, 사립학교 민주화, 보충수업, 자율학습 철폐, 평교사회 결성, 사학 강제기부금 반환투쟁 등을 전개하면서 교사들의 실질적 권익향상을 끌어내면서 지지층을 넓혀 나갔다. 이즈음 전북교협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던 평교사회들이 단체로 전북교협에 가입하여 회원이 급증하게 되었다. 특히 사립학교 평교사회들은 사립학교의 고질적 문제였던 기부금, 부교재 채택료, 여교사 결혼 후 사직문제 등을 문제제기해 가며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88년 11월 20일 민주교육쟁취 전북교사대회에서 표면화된 노조결성의 열망은 내부논의를 불러 일으켰다. 이때는 5공 청산에 대한 중간평가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된 가운데 88년 말 정부의 공권력 강화방침이 발표되어 탄압이 예고되는 시기였다. 노조건설을 위한 자체역량 평가에서 시기상조론도 나왔으나 89년 2월 19일 전교협 대의원대회에서 노조결성을 결정함에 따라 전북교협에서도 노조건설을 추진하게 된다.
3월 25일 전북대에서 열린 제3차 전북교사대회는 최초의 회장경선으로 전북 교육운동에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89년 4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을 계기로 공안정국이 조성되는 조건에서도 교원노조 건설의 열기는 달아올랐다. 89년 5월 14일 전북대에서 열린 전북교직원노동조합 발기인 대회 및 준비위원회(준비위원장 곽은종·집행위원장 차상철) 결성대회는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300여명의 발기인이 모였다. 정부의 노조불허 방침과 주동교사 전원에 대한 징계방침이 발표되는 속에서도 결성대회 참가준비와 지·분회 결성 준비는 진행되었다.
89년 5월 28일 4.19 교원노조 이후 30년만에 자주적 교원노동조합이 탄생하였다. 전북에서는 사복경찰들이 교무실까지 들어와 감시하는 속에서도 100명이 서울 결성대회에 참여하는 의지를 보였다. 6월 5일 전주 영생고와 군산 제일 중고가 전북지역에서 최초로 분회를 결성한 이후, 19개 학교분회가 결성되었다. 6월 15일 전주 금암교회에서 4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전교조 전북지부가 결성되었다. 조합원은 960여명이었다. 당시 당국은 전면파면, 해임방침을 현실화하면서 강경대응으로 나섰다.
정은숙, 유영진, 차상철, 김호훈, 권오인, 박일관 교사 등 전북지역에서는 6명의 교사가 투옥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탈퇴각서를 제출하는 조합원이 늘어났다. 교사들은 대량 연행전술로 대항했다. 진안 용평국교 학부모들이 정은숙 교사의 석방과 복직을 요구하며 학생들을 등교시키지 않기도 하는 등 학부모들과 지원단체들의 노력이 있었으나 여의치 못했다. 전교조는 단식수업과 명단공개로 수위를 높였다. 전북에서는 1,000명의 조합원 중 541명을 7월 18일자 한겨레신문에 공개하였다. 8월말 전북지역에서는 66명의 교사가 해직되어 학교 밖으로 유배되었다. 전교조 교사들은 학교 밖으로 밀려났지만 현장 교사대중과 학생들의 압도적 지지로 조직은 사수되었다. 개학 후의 출근투쟁이 빚어낸 눈물겨운 장면들과 늘어나는 조합비, 1,700여명의 후원회원의 지원 등이 증명하듯 전교조는 대중의 힘으로 지켜질 수 있었다. 80년대 초중반 헌신적인 선진교사들의 노력으로 싹을 틔운 교육민주화운동은 이후 10년간의 시련기를 거치며 합법적인 교원노조활동으로 제도화되면서 일정한 단계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
학교 밖으로 추방되었던 교사들은 94년 해직교사 복직조치와 99년 7월 전교조 합법화를 통해 정든 교단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미영 교사 전북 교육운동사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이로 꼽히는 이미영 교사(46·고산고 교사·전북청소년교육문화원 이사장). 지난 1986년 전주 Y교사협의회에서 총무를 맡은 이래 전교조 전북지부장까지 전북의 교사조직 창립에 대부분 관여했다. 87년 전북 교육민주화사건으로 첫 해직되었다가 88년에 복직되었으나 전교조 창립관련으로 89년 다시 해직되었다. 교단 밖의 교육운동 10년 세월을 감내하고 98년 9월, 그리운 교단으로 복직했다. “뒤돌아볼 여유도 없이 20년 세월이 그렇게 훌쩍 지나가 버렸다”는 그는 “교육운동 초기의 열정들이 너무 좋았다”고 고백한다.
86년 교육민주화선언이 터지자 당시 교육관료들은 ‘불온한 싹’을 자르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인적 관계를 동원해 ‘문제교사’를 강박했다. 매일 교장과 장학사가 경위서 제출을 강요하고, 가족을 동원하는 와해공작을 폈을 때 실제적인 불이익 처분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주는 괴로움이 너무도 컸다고 한다. 아영중으로 좌천되었던 이미영 선생은 감봉조치 당한 액수만큼 돈을 걷어 월급봉투를 채워 주었던 그 때 동료교사들의 ‘말없는 격려’가 가장 큰 힘이 되었다고 회상한다. 지난 시절 정치 민주화와 맞물린 교육 민주화의 기본 틀을 만들어내는데 진력했던 그의 교육 ‘실천’은 요즘 농촌과 청소년교육현장에 집중되어 있다.
△정은숙 교사 (48·봉동초등 양화분교 교사)는 89년 5월 전교조 발기인대회에서 사회를 봤다는 ‘죄목’으로 곧바로 직위해제 되었다. 사회 전체가 각계 각층에서의 민주화 요구로 달아 올랐던 시대였던 만큼 교육당국의 탄압은 거셌지만 그만큼 지지, 격려하는 쪽의 호응도 컸다. 진안용평초등학교 5학년 담임을 맡았던 그는 탄압을 피해 지역구 야당(평민당) 국회의원이었던 이상옥 의원이 내준 차를 타고 학교에 출근하기도 했다. 야당 정치인과 재야운동, 주민들이 민주화를 내걸고 함께 고락을 나누던 시절의 풍경이다. 진안용평초등학교 학부모들은 자식들을 등교거부 시켜가면서까지 정교사에 지지와 격려를 보냈지만 정교사는 결국 연행, 구속되었다. 국가공무원법 위반에 ‘퇴거불응’을 죄목으로 전주교도소 0.72평 독방으로 직행한 그는 40일 동안 수감된 끝에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을 받고 나왔다. 전교조가 창립되면서 전북지부 초등위원장을 지내는 등 다른 해직교사와 마찬가지로 10년의 잃어버린 세월을 견뎌야 했던 그는 교실 밖에서 그리운 학생들을 만나는 것으로 ‘가르치고 싶다’는 절절한 욕망을 다스렸다. 용담댐이 들어서면서 진안용평초등학교는 수몰되어 사라졌지만 그때 그 교실의 어린 제자들과의 만남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재규 기획위원 /한재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