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식칼럼] 스승의 날과 선물
2006년 05월 01일 (월) 새전북신문
바야흐로 선물의 계절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이어진다. 심한 표현일지 몰라도 즐거워야 할 이 때가 어떤 이들에겐 공포(?)의 계절이기도 하다. 그중에서 이맘때면 어김없이 사회적 이슈가 되곤 하는 스승의 날 선물에 관하여만 말하고자 한다. 필자가 현직 교사여서 말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하다.
‘속수지례(束脩之禮)’, ‘묶은 육포의 예절’이라는 말로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할 때 작은 선물로써 예를 갖춘다는 뜻이다. 속수는 열 조각의 마른 고기로, 예물 가운데 가장 약소한 것이다. 공자께서 가르침은 예에서 비롯된다고 보아 제자들에게 가장 작은 선물인 속수를 가져오도록 함으로써 제자의 예를 지키도록 한 데서 유래했다. 선물이 진솔한 마음을 담은 존경의 표현이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물량 위주로 형식화한 것이 현실이다.
존경의 표현이 물질로 형식화
선물(膳物)을 사전에서는 ‘친근, 애정, 존경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는 물품’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전적으로만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논란이 되는 건 스승의 날 선물이 뇌물일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뇌물은 ‘직권을 이용하여 특별한 편의를 보아 달라는 뜻으로 주는 부정한 금품’을 말한다. 교사로서 정말 부인하고 싶지만 스승의 날 선물이 뇌물의 성격이 전혀 없다 할 수 있을까? 선물이 비담임 교사보다는 담임교사에게, 예전의 은사님보다는 현재의 교사들에게만 집중되는 현상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결과적으로는 그런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학교에서 먼저 “촌지나 선물을 절대 받지 않습니다. 주시면 다시 돌려보내겠습니다. 촌지가 없어도 소중한 자녀를 열성을 다해 보살피겠습니다.” 라는 내용의 가정통신문을 보내주었을 때 무척 고마웠다는 말을 주변 학부모들에게 자주 들었다. 그만큼 부담을 느낀다는 얘기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 교사, 학부모의 관계는 수직적이며 아이 때문에 교사는 권력의 위치에 있다. 선생만 할 때는 몰랐는데 학부모가 되고 보니까 알겠다.
스승의 날 쉬는 것은 미봉책일 뿐
대부분의 선생님이 뇌물이나 촌지 등과는 무관하게 교직을 수행하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촌지 논란이 일 때마다 모두 싸잡아져 비난 받는 것이 안타까울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며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해당되지 않으니까.” 하고 방치할 일이 아니다. 올해는 고육지책으로 스승의 날을 휴일로 정한 지역이 적지 않다. 그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을 피해가는 것이며 너무 안일한 대처이다. ‘눈 가리고 아웅’한 격이다.
교사와 학교가 나서서 ‘선물 안 받기’ 운동을 벌였으면 한다. 선물이 오히려 교단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면, “스승께 선물하는 건 미풍양속.”이라거나 “감사할 줄 아는 태도도 길러줘야 해.” 라는 수동적인 합리화로 비껴가기보다는 학교와 교사가 먼저 선언하고 나서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 교사와 공교육에 대한 신뢰는 더욱 높아지리라 믿는다. 우리 사회가 지금의 왜곡된 교육열을 넘어 서서 성숙한 뒤에야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속수지례’의 아름다움은 그때 기대해도 충분하다.
부끄럽게도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핑계 삼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5년이 넘었건만 가르쳐주신 초중고 선생님 한 분 변변히 찾아뵙지 못했다. 그러고도 스승의 날이 가까워 오니 선물 받을 생각부터 한다. 이런 낮 뜨거움에서 나온 제안으로 여기면 고맙겠다.
삶의 길을 밝히 열어주신 은사님들께 지면으로나마 머리 숙여 송구한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
/(사)전북청소년교육문화원 정책기획실장